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 필자 ⓒ제주인뉴스

한국군이 총을 쏘면서 “살아있는 놈은 일어나서 손을 들어라! 그러면 살려준다.”라고 하는 큰소리가 들렸다. 이 때 우리 일행에도 인민군 총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한국군과 얼마간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능선 밑을 바라보니 달아나는 인민군을 향해 한국군이 총을 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가 멎으면서 한국군이 총을 들고 내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죽느냐 아니면 손을 들고 살려달라고 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살아있는 놈은 나와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제주도 사투리 소리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살려주십시오!”하며 벌떡 일어섰다.

군인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총을 가슴에 겨누고 위협했다. “살려주세요! 나는 제주도 사람입니다.”라고 애원 했다. 처음 여수 선소리 내무서에서 나올 때는 인민군 군복을 입었지만 행군 중에 민간인복으로 갈아입었었고 갖고 있는 것은 단지 쌀자루 하나뿐이었다.

군인은 나에게 “야! 제주도?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예! 저는 광주에서 살다가 인민군에 끌려가서 피난을 다니는 중입니다.”라 고 대답했다. “그러냐? 그럼 부대에 가서 조사해보자”라고 말하면서 “너는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도망가다 다 죽었어.”그리고는 우리 부대로 가자며 총 한 자루를 주는 것이었다. 그 총은 인민군 총을 노획한 것이었다. 또 총 한 자루를 더 주면서 어깨에 메고 가자고 하는데 제주도 사람이었기에 나를 믿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총을 양 어깨에 메고 같이 가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제주도 어디냐?”고 군인이 물었다. “제주도 한림입니다.” “그래? 나는 한림읍 명월인데, 나를 모르느냐?”고 물었다. “실은 우리집은 금악입니다.”고 대답을 하였다.

▲ 시체더미에서 울부짖으며 가족을 찾고 있다 ⓒ제주인뉴스

“그래?” 하면서 반문하고는 금악사람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 사람들은 거의 4.3사건 때 죽어서 살아난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이란 말을 하였다.

나는 친절하게 대해준 고향출신을 만나 저녁때 한국군 부대에 도착하였다. 군인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말하자 군인들은 나에게 와서 “너 어디냐?”며 묻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 가보니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10여명 정도가 있었다. 나보고 하는 말이 “너는 여기 와서 밥을 가져다 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도 먹으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후 선임하사인 고향분이 말하는데 “소대장이 들어오면 보고해서 우리부대의 전사자대신 너를 한국군으로 입대하여 근무하면 어떻겠냐?”고 말하였다.

그 당시 전투 중에 전사자가 많아서 부대병력 보충이 어려웠을 때라 나와 같이 포로 중에 믿음이 가는 사람을 현역병으로 보충했던 때였다.

한 시간쯤 지나니 소대장이 왔다. 먼저 나에 대한 보고를 한것 같았다. 소대장이 나를 불렀다. 소대장은 나에게 “너 군인생활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예, 할수 있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대장은 제주도 출신이었고 내가 인민군에 잡혀서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가급적 나를 많이 도와주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하는 말이 상부에 보고할 것이니 며칠 기다리고 있으면 상부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방부에 상신한 것이 아니고 연대장만 허락하면 전사당한 군인대신 복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대장은 생각 한 것 같다. 그런데 한국군 부대에 와서 3일째 되는 날 밤12시쯤에 깊은 잠이 곤하게 들었을 때 “다 나와!”하는 소리가 났다. 밖에 나와 보니 포로들은 미군트럭에 타라고 했다. 쳐다보니 코가 큰 미군들이다. 무섭기 짝이 없다. 이제는 어디로 또 끌려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앞일이 캄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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