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숲 대효 스님.
▲ 옛숲 대효 스님.

 

 어린이는 근심도 걱정도 없다. 미래의 희망도 절망도 없다. 시간의 개념이란 아예 없다. 그래서 과거에 일어난 좋고 나쁜 일에 어떤 대응도 하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어린이를 천진불이라고 부른다. 사전에서 천진불의 의미를 ‘법신불’(법신은 천연의 진리이며 우주의 본체라는 뜻)을 달리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법신은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며 모양이 없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하다. 때 묻은 사람들이 돌아갈 곳이다. 천진불로 타향살이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다.

 이런 천진불은 모든 이의 가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슴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천진불, 법신불이 자리 잡은 곳을 상징적으로 지칭한다. 가슴만이 법신불의 자리는 아니다. 또 사람이나 동물만도 아니다. 일체만물의 모든 존재는 가슴에 해당하는 법신불이 없는 곳이 없다. 형상이 없는데 어찌 가슴뿐이겠는가. 법신불은 부처라고도 통칭하고 불성, 자성이니 마음이라고도 한다. 불성 자성 본성 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이것 그것 이 저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언어 동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뭐라고 하든 모두 해당되기도 하고 또 뭐라고 하던 틀리기도 하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아이로 바람직한 존재로 나타냈다. 이 천진불은 아이를 가리키지만 아이만을 국한하지 않는다. 천진불은 젊은이에도 있고 노인에게도 있고 여성 남성 귀천 빈부 등 모든 이에게 있다. 소나 말 개 고양이 짐승 미생물 같은 모든 동물에 있고 생물과 무생물에도 있다. 흙먼지 바람 공기 미세먼지 세균이나 박테리아에도 물론 있다. 아이는 아이성으로 통할 수 있다. 이 아이성을 아이라고 부른다. 아이로 돌아갈 때, 때 묻지 않고 거짓이 없으며 있는 그대로 또는 자연 조작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아닌 것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 다 해당된다.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다.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다, 로 통한다. 차별이 없다. 모두 하나며 하나가 모두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이 없으며, 크고 작음이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고, 거짓과 진실이 통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과 조작이 없다. 모두 자연이고 모두 조작 인위가 된다. 모두 진실이고 모두 거짓이라야 하나다. 하나는 둘이고 열이고 백이고 천이고 만이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다.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사람이 신이고 신이 곧 사람이다. 깨달음이 미혹이고 미혹이 깨달음이다. 고가 낙이고 낙이 고다. 곧 이대로다. 따로 구할 것이 없고 따로 의지할 것도 없다. 기쁨이면 슬픔이고 가진 거면 잃는 것이다. 이대로 해탈이고 이대로 열반락이다.

 그래서 어느 수행자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춤을 추고 노래했다고 한다. 이는 도인의 춤이고 도인의 노래다. 깨닫고 보니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을 무엇을 깨닫는다 하는가. 깨닫기 전에 이미 깨달아 있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라고 하는 말이 깨달은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배운 것을 써먹을 줄  모르면 굶고 산다. 익힌 것을 써 먹을 줄 모르면 힘들게 산다. 가진 것을 써 먹을 줄 모르면 고생하고 산다. 깨달음을 써 먹을 줄 모르면 어리석게 살아서 너무 힘들고 고생하며 살게 된다. 깨달음을 쓰고 사는 것이 깨달아 가는 길이다. 닦는 것이다. 깨달음을 쓰지 못하고 안 쓰고 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누구나 깨달아 있는 줄 알고 자신을 바라보고 밖에서 구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쓰는 것이다. 밖으로 의지처를 구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쓰는 것이다. 이런 귀하고 아름다운 깨달음을 쓰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목숨이 목숨이 아니다.

 나에게 있는 깨달음을 쓰지 않으면 병신으로 산다.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 내가 불행하면 불행한 사람을 두고 보는 가족이 불행하고, 이웃 가정이 불행하면 이를 보는 이웃이 모두 불행하다. 불행한 가정이 늘어나면 동네 고을이 불행하고 나라가 불행하고 인류가 불행하다. 한 사람의 불행이 세상의 불행이요, 한 사람의 행복이 세상 전체의 행복이다. 깨달음을 쓰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밝고 크고 넓게 쓰는 것이다. 깨달음을 쓰는 것이 수행이요 도를 닦는 것이고 세상을 밝히는 것이고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깨달음을 쓰는 것은 후회 없이 넉넉하게 대만족으로 사는 것이다.

 깨달음을 쓰는 것은 고땡(고통 끝, 행복 시작)이다. 한 사람의 고땡이 가족의 고땡이 되고, 나아가 모든 세상의 고땡이 된다. 밝은 얼굴을 보이면 보는 사람이 밝고 편하다. 한 사람이 밝으면 가족 이웃 친구 동료가 밝아지고 세상이 밝아진다. 세상이 밝아지면 짓궂은 일은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림자 절망도 그림자 실직도 그림자 희망 기대도 그림자 성적도 경제도 그림자 국방도 그림자 분단도 그림자 억울함도 사라지고 밝아진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는 것은 나 한 사람이 밝아지면 그만이다. 내가 밝아지면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지고 세상이 다 밝아진다.

 내 안에 다 있다. 내 안에는 스승이 있다, 내 안에는 한량없는 지혜가 있다. 내 안에는 밝은 광명이 있고 무량 보배가 있다. 내가 삼보다. 그래서 자성삼보라 한다. 행복은 내 안에 가득가득 쌓여있으니 행복을 쓰고 살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을 쓰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쓰면 쓸수록 자구자꾸 쌓여서 세상에 퍼져나간다.

 무엇을 힘들어 할 것인가. 어려워할 것인가. 자신에게는 무한한 보배가 있으니 자신을 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보고 밖을 중심으로 보지 말라. 밖을 중심에 두면 기울어져 넘어진다. 나 밖에서 구하면 괴로워진다. 나밖에 의지처를 두면 어지러워지고 기울어져 쓰러지고 만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쓰고 살면 항상 미소가 흐른다. 내 안의 스승의 말에 귀 기울이면 느긋하고 든든하다.

 항상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미래에만 자신을 두는 것은 자신을 외면하고 자신을 멀리 떠나보내려는 것과 같고,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을 버리고 어찌 자신을 논하겠는가. 자기 자신은 보배이니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며 어미가 아기를 돌보아 한 순간도 눈을 팔지 않듯이 아끼고 살피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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