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화 칼럼](34)국군에 입대
[양일화 칼럼](34)국군에 입대
  • 고성한 기자
  • 승인 2017.11.04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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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 하사관 훈련소 시절 ⓒ제주인뉴스

4.3사건 발발 후 그해 12월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감방에 있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고 5년여 만에 죽을 고생을 하고서 한달 전 겨우 집으로 돌아 왔으나, 5월 26일 야속하게도 군대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영장을 받고 며칠 동안 집에 있으면서 군대 갈 걱정을 많이 하였다. 군대를 가려해도 차비가 한 푼도 없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금악에 있는 집터라도 팔아서 용돈으로 주려고 하였지만 그 당시는 돈 있는 사람이 없어 밭을 팔려고 하여도 살 사람이 없으니 빨리 팔수가 없었다.

군 입대 날은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밭을 못 판다. 아버지는 불구된 몸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밭을 사 달라고 사정하는 모양이다. 며칠 뒤 밭을 살 사람이 나타나서 제대로 밭 값도 못 받고 아버지는 밭을 팔았다. 나는 이 돈을 조금가지고 가서 3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아버지의 손발이 마비되어 활동을 전혀 못하게 되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괴롭다.

그러나 국가에서 부르는 일이라 나는 대담하게 군대에 입대할 것을 결심하였고 드디어 아침 출발시간이 되었다. 마을주민들 남녀노소가 지서마당에 모였으며 내가 군대에 간다고 환송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서 마을주민들이 모였다. 나는 지서 마당안으로 들어갔다. 지서주임이 “마을주민들은 따로 줄을 지어 서시오” 하고, 나는 마을주민을 바라보면서 그들 앞에 섰다. 지서주임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은 이번 영장을 받고서 군대에 갑니다.” 하고 대형태극기를 어깨에 감아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다.

마을주민들도 따라서 만세삼창을 부른다. 지서주임이 이야기를 하는데 ‘양일화 군이 군대가서 남북통일을 달성하여 백두산 정상에 태극기를 휘날리고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연설한다. 모두가 만세삼창을 부른다. “다음은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서 군대에 입대하게 되니 무엇보다도 영광입니다. 싸움터에 나가서 공산당을 무찌르고 남북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싸우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례를 하자, 모두가 “대한민국 만세!” “양일화군 만세!” “만세!”를 부르면서 마을거리를 나와 한림초등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마을청년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나와 같이 초등학교까지 환영을 하여주고 같이 가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언제 왔는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같이 동행하였다.

목적지인 한림초등학교 운동장에 갔다. 마을 분들은 잘 갔다 오라고 하면서 서로가 악수를 청하고서 고림동으로 돌아갔다. 운동장을 바라보니 각처에서 온 군인가는 사람이 수십 명이 모여 운동장에 열을 짓고서 앉아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끼여 조금 있으니 군인들이 화물차를 세우고는 앞 대열부터 차례로 차를 타라고 한다. 차에 타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도착하여 보니 제주시 광양에 있는 운동장이었고 여기에 모두가 집합을 하였다.

지금의 시청 앞 운동장에 열을 지어 앉아 있으니 아버지가 옆에 와 계셨다. “아버지? 왜 오셨습니까?”라“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 다리가 아픈데도 버스를 타고서 찾아 왔다고 하시면서 “사이다 한 병을 사고 왔으니 이거 시원하게 마셔라” 하시는 아버지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났다. 전쟁 중에 아들을 군에 보내는 부모 마음이 어떨지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였다.

나는 사이다를 맛있게 먹고 출발할 시간이 되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제는 훈련소로 가야 됩니다”라고 말하자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는데 ‘삼대독자 외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되다니 그것도 전쟁터로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린 육지로 가지 않고 모슬포에서 훈련을 받게 될 것이고 휴가를 받아서 아버지를 곧 뵙게 될 것입니다” 라고 답례로써 서로간의 긴작별을 고 하였다.

아버지께서 아픈 다리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옮기면서 저 멀리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처량하기 그지없다. 

한참 전쟁중인 1953년 5월 26일, 우리들 수백명은 차를 타고 모슬포훈련소 8연대 155중대(군번:9439510)에 편입하여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훈련 받는 동안에 휴가를 받아서 집에 가서 부모님을 상봉하게 된것은 정물(현 이시돌 목장)숙영지에 이북출신 박중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알아보고는 나에게 말한다. “너의 고림동 집에 가자”라고 하며 나의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고 올 적에는 대나무 빗자루를 몇개 만들어 오자고 하면서 둘이서 고림동으로 내려와서는 나의 부모님을 면회 할 수 있었으니, 그때 부모님께서  안심하는 기색이셨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서 부대로 돌아갔다.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가 오는 도중에도 많이 있었지만 고림동까지 내려와서 막걸리 한잔마시고 갈 계획으로 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나는 제대하여 집에 와서 박중사를 만나 옛이야기를 하면서 생활하곤 했는데 얼마 후 그분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훈련도중 일요일 날에는 어머님은 메밀떡을 만들어 면회를 오셔서  몇번 만나기도 하였다.

모슬포훈련소에서 훈련병 군인들은 나쁜 행동을 많이 하였다. 모슬포 바구니 오름옆에 큰 우물이 있었다. 하루는 훈련병들이 그 우물로 빨래하러 나가는데 훈련병들은 이열종대로 빨랫감을 들고서 행군을 하고 간다. 길 양쪽에는 고구마 장사와 떡 장사가 있는데, 떡을 사 먹으려고 하니 돈은 없고 벽돌을 반 쪼개서는 그 위에 비누를 살짝 발라서 노랗게 만들고, 담배 빈갑 속에다 종이를 돌돌 말아 넣고 봉하면 틀림없는 담배처럼 보인다.

이렇게 만들고 나서 군인들은 행군을 하면서 “아줌마, 고구마 빨리 가져오시오.”하고 외치면 얼른 가지고 오는데, 담배와 비누를 주고 고구마와 떡을 얼른 받아들고 대열에 들어와 행군을 하곤 하였다. 떡장수 아줌마는 담배를 받고 보니 빈 껍질뿐이다. 아주머니는 그 군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이미 멀리 행군하여갔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민간인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양심적인 군인도 있어서 진짜 비누와 담배를 주고 바꿔먹기도 했다.

그 후부터는 그 마을 고구마 장사가 안 나온다. 떡을 사 먹으려고 하면 떡집을 가야한다. 떡을 사먹으려고 해도 욕을 많이 듣는다. 한두 사람으로 인하여 군인전체가 욕을 먹는데, 나는 어머니는 가끔 떡을 만들어서 면회를 오니 배고프지 않게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이시돌협회가 있는 자리에는 속칭 정물오름이 있는데, 그 앞 벌판에 제2숙영지가 시설되어 우리는 그 자리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이달봉 사격장을 배경삼아 매일같이 행군을 하면서 사격훈련을 하였다.

그다음 서귀포 법호촌에 가서 사격훈련을 하고 중문면 색달 오름에서 사격훈련을 하고 또 당오름 방향으로 향하여 있는 원물 오름에서도 사격훈련을 하였다. 하사관교육을 받은 사람은 여기를 다 거쳐서 나가야 한다. 나는 인민군훈련을 많이 받아 봤지만 그 때에도 기합은 받지 않고 훈련을 받았는데 우리 한국군인은 한사람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주면서 이유 없이 때린다. 심한 기합을 받을 때도 종종 있다.

그 반면에 인민군은 한사람 잘못하면 때리는 법이 없다. 스스로 자기가 비판을 하여야 한다. 이것을 자아비판이라 하여 오늘의 일과에 대한 자기잘못이 있으면 반성을 하게 하는데, 훈련이 끝나고 점호시간이 되면 1개 소대가 빙 둘러앉아서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한사람씩 일어나서 오늘의 행동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거짓말 없이 솔직히 말하여야 한다.

6하 원칙(언제, 어디서, 누가, 무었을, 어떻게, 왜)에 의하여 자기비판을 하여야 하는데 매 맞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다. 만일 조금이라도 숨기는 일이 있으면 공개석상에서 인민재판에 넘긴다. 상급자는 다 아는 일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아무잘못이 없으니 용서 합시다’ 하고 소대원이 전원찬성하면 무사히 통과되고 소대원이 말하기를 ‘이 동무는 자기잘못을 숨기고 있다’고 하면 그 즉시 인민재판으로 넘겨져 사형에 처한다. 이것이 북한 당국이 인민들을 통치하는 하나의 강력한 수단이다.

하사관훈련교육도 다 마치고 사단배치를 받으려고 하니 며칠 동안 훈련소에서 쉬면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며칠 후 화순 항에서 LST(Lading Ship Tank : 탱크상륙전용 배)라는 배를 타고 육지로 가는데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었으며 3일만에 도착한 곳이 강원도 속초항이었는데 여기에 도착하여 부대숙소에 배치되고 본격적으로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3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그 후 45일 동안을 하사관 학교로 입교하여 혹독한 훈련을 받고 이로써 모든 교육을 수료하여 29사단(사단장 최홍희 준장,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가라대를 배웠으며 1950년 초까지는 당수도, 공수도, 가라대, 권법 등 다양하게 불렸으나 부대창설 1주년을 맞이하여 이승만대통령 앞에서 무술시범을 보였는데 이때 “태권도”란 휘호를 받게 되었다. 부대 경례구호는 “태권”)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나는 하사관계급장을 달고 기관총사수로 근무하였으며, 29사단 83연대 중화기 2중대 2소대 기관총사수로 근무하다 인제군 전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분대장을 2년하고 금화고지를 향해있는 건봉산 최전방고지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겨울철에는 영하 30도가 되는 고지로 매우 추웠으며 이곳에서는 아침새벽에 보면 인민군들이 하얀 옷을 입고서 동계 훈련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다음 경기도 포천으로 이동하고 향도근무를 서면서 1등 중사계급장을 착용하고 선임하사로 진급되어 성실히 근무하다 52개월 만에 군 생활을 마감하며 제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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