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제주인뉴스

저녁식사가 5시에 끝나면 취침점호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므로 운동하고 싶은 사람은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책을 읽거나 또는 목욕이나 세탁도 하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수용소 내에서 사귄 친구가 있으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포로에 대한 교양교육은 수용소 내에서 장교들이 강의를 하였는데, 1951년 여름부터는 유엔군사령부 민간정보 교육국에서 강사가 와서 강의하였고, 그 내용은 한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한국전쟁의 발발과정, 유엔의 목적과 기능, 시장 경제와 전체주의에 대비되는 민주주의의 원리, 자유세계 여러 나라와 그 나라들의 발전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한 것이었다.

▲ 직업교육훈련인 양복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 ⓒ제주인뉴스

여기에서 자유체제 사회의 우월성과 전체주의의 문제점 등이 상세히 열거하며 강의가 되었다.
그리고 교육내용 중 중국의 정치와 사회, 역사 등이 있었는데, 이는 중공군 포로들을 고려하고 중공군이 북한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임을 고려해서 포로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교육의 결론은 반공적인 사상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의 모순이나 약점 같은 것은 강의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공산주의자들의 거부반응을 생각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또 하나의 교양교육의 내용으로는 문자해독을 위한 기초반 수업이 있었고 직업훈련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수용소생활을 하는 동안 한가지씩의 기술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보건위생과 여가활동 등에도 도움이 되는 교육내용이 있었다.

▲ 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 ⓒ제주인뉴스

당시 포로로 잡혀온 의용군에는 초등학교도 못나온 문맹자가 많았고 셈도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예상외로 문자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고, 직업훈련에서는 목수 일을 배우는 사람, 머리 깎는 이발사, 구두 수선, 양복 재단기술 등에 수강자가 많았다.
 
그 외 교양교육의 하나로 이틀에 한편정도의 영화(활동사진)도 구경 시켜주었다. 여기에서도 기본적으로 권세가 있거나 사회에서 양복재단기술이나 대장간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기술교육을 시킨다하여 교관으로 차출되니 그들은 하루 종일 편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형무소 포로 중 어느 누군가가 쉬는 시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인민군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전쟁의 시작은 6월 말에 전면공격을 하여 2~3일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는 지하남로당과 애국 인민들이 합세하여 한국정부를 전복시키고 한반도 전역을 통일하여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전쟁을 종결하기까지 1개월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 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 그러나 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제주인뉴스

그리하여 8월 15일에는 해방 5주년 기념식을 서울에서 통일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남하하는데 지장을 준 것은 서울점령에 4일이나 걸렸고 한강을 건너는데 무려 6일이나 지체되면서 도하장비가 부족하여 수영하면서 도하하던 인민군들이 한강에 빠져죽는 일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국군은 한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인민군의 작전계획에 차질이 왔다는 말도 들린다. 인민군들이 불평을 하면서 국군은 전차도 없고 인민군전차에 대항하는 대전차지뢰도 없다는 말도 하였다.

중공군이 북한인민군 지원을 위해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 전 기간 중으로, 윤번식으로 교대하면서 전쟁에 참여한 중공군의 연 인원이 23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 포로수용소 막사 내에서 점호를 취하는 모습 ⓒ제주인뉴스

이들 참전군들은‘중국인민지원군’이라 하여 인민들 스스로가 지원한 지원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에 전투요원으로 참여한 군인 외에 군속으로 온 노무자수도 60여 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 말을 포로수용소에서  들은 바가 있다.

그리하여 포로들 중에는 중공군과 노무자들이 많았고 중공군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한국군들과 비교 할 수 없는 재래식 낡은 총이고 쌀과 소금을 가지고 있고 수류탄 하나씩만 가지고 공격하는 소위 인해전술(人海戰術)로써, 새까맣게 계속 공격하는 것이 마치 벌떼모양을 하고 달려드니 국군과 비교해서 6내지 7대 1 또는 10대 1이란 압도적인 숫자로 아군과 교전했다는 것이 한국군의 말이었다.

중공군이 처음 참전할 때의 숫자는 90만 정도였고 휴전 당시에는 중공군 총병력이 130만 여명이라 하였다.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군하여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중공군보병 30개 사단과 포병3개 사단 그리고 각종 지원부대를 포함해서 30만 대군이 1951년 1월 1일을 기하여 이른바 중공군의‘신정대공세’로 공격하여왔다. 이로 인하여 국군과 미군은 또다시 후퇴하게 되어 38도선이 무너지게 되고 계속 남하하게 되면서 서울에서는 추운겨울에 1.4후퇴의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전경(벽면에는 항고가 가지런히 걸려있고 포로들이 침구를 정리, 정돈하고 있다) ⓒ제주인뉴스

이때 미국워싱턴과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지도부의 맥아더사령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확전’과 ‘철군’사이에서 고심했다고 한다.

전쟁을 계속하려면 중공군참전에 대한 대응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해안을 봉쇄하는 것, 중공본토에 있는 공업시설을 폭격 하는것, 유엔군의 자유중국군을 편성하고 자유중국군(대만)의 중국본토공격을 허용하면서 원자탄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유엔군사령과 맥아더 장군은 적극 본국에 요청했다고 하였다. 맥아더는 핵무기사용과 ‘확전’을 주장한 관계로 사령관직을 그만두게 되고  군복을 벗게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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