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부산 가야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이 수용소의 처음 시설당시부터 수용되어 52년도 중반까지 만 1년 정도 있으면서 철조망도 치고 도로도 만들고 운동장도 고르고 천막도 치면서 살았기에 거제도 수용소시설 내용이나 인원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1951년도 초에는 부산에 있던 포로들 중 5만 여명이 이송되었고, 전쟁 중이라서 각 지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에 붙잡힌 포로들이 강원도 원주, 서울 영등포, 경기도 수원, 제천, 대전, 하양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부터 계속하여 부산으로 후송되면서 거제도수용소가 시설됨과 동시에 많은 포로들을 수용하면서 51년 3월 말에는 벌써 그 숫자가 10만 명에 달하였다.
그 해 6월 말에는 거제도수용소 포로인원은 14만명에 이르러 그 수용인원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용소 내에서 포로들 끼리 문제를 일으켰기에 포로들을 감독하고 운영하는 미8군사령부에서도 골칫거리가 되었다.
거제도 수용시설의 규모는 한마디로 엄청났다. 60, 70, 80, 90의 4개 구역과 28개수용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 계곡엔 제6구역이 그리고 동부 계곡에는 제7, 8, 9 구역이 배치되어 있었다.
1개 단위구역에는 6천명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포로들의 숫자는 늘어났고 이리하여 후송되는 포로들이 계속하여 만원이 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들어오면서 1952년도에는 포로들 숫자가 자그마치 17만 명에 이르게 되면서 나와 같은 반공포로들 일부가 영천 포로수용소로 이송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