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 필자 ⓒ제주인뉴스

63공산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군을 수용소에 납치하여 가두고 한국군 보초병1명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공산포로들은 반공포로에 대해서도 폭력을 가하는 등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기간은 1952년 5월 7일부터 6월 9일까지 무려 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로 수용된 인원이 13만 2천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국제연합군 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였다.

이들 포로들은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하면서 폭력이 일어났고 정치적 대립까지 하게 되었다. 이들 포로들이 분열하게 된 원인은 1949년 제네바협정에 따른 포로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 부터였다.

1952년 4월말 북한당국의 고위층 한사람인 남 일(南日)이라는 자가 ‘공화국의 위대한 전사들은 수용소 당국의 어떠한 심사기도나 반공포로들을 분리시키려는 데 대하여 죽음으로써 저지할 것이며, 심사계획을 중단 또는 포기케 하는 보장을 유엔군 당국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흥정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미군장교들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고위 장교를 납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포로들은 수용소사령관 도드준장을 납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포로들은 흑인병사들에 의해 금품(금반지) 등을 강제로 빼앗기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사건이 거의 매일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공산포로들이 강하게 항의하였다. 1952년 5월 7일 포로들은 급기야 사령관의 면담을 요구하게 되어 도드준장이 이에 응하게 되었고 63빨갱이 수용소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도드준장이 납치되었던 것이다. 63수용소 앞에서 도드 준장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하던 중 한 무리의 포로들이 소리 없이 도드 준장을 에워 쌓았다. 얘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포로들은 도드준장을 철조망 안으로 밀어 넣어 눈 깜짝할 사이에 포로가 되고 만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그야말로 세계 뉴스거리가 되고 말았다.

제63 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 소장 미 육군 F. T 도드 준장을 납치하고서는 그 석방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반공포로들이 수용소장납치 및 동료포로들을 살상 하는 행위 등이 일어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이 수십여 대의 장갑차를 몰고 수용소 안으로 진입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전원 엎드려! 만약 움직이면 쏜다.”며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가 미군의 발포로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을 위시한 반공포로들과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포로 50여 명이 더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드 장군은 공산포로들의 요구대로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나서야 납치 후 3일 만인 5월 10일 날 무사히 석방되었으며, 그 후 조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사를 받고는 포로수용소장에서 해임되었다.

▲ 포로수용소의 망루 ⓒ제주인뉴스

그러나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 폭행․ 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수용을 결정하고서는 H.L.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들을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떠들며 살벌했던 63공산포로 수용소가 이제야 조용해 졌다. 이때 마이크에서는 “남한으로 갈 사람은 지금 나와라, 모두 용서해 준다.”고 방송을 하였다. 몇몇 포로들이 손을 들고 일어섰는데 그 수가 몇 십명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64수용소의 우리와 같이 있게 되었다. 63수용소 포로와 65수용소 포로들은 미군의 철저한 감시 하에 서 생활하게 되었다. 64수용소 포로들 중에는 남한 의용군 출신이 많았고 65수용소 포로는 인민군장교 출신이 많았다. 63수용소 포로들은 공산주의의 극렬분자라 하여 수용소 내에서는 빨갱이수용소라는 말로 통하였다. 63수용소의 포로들은 매일같이 북, 장구를 치면서 인민국가를 불렀다. 이것은 반공포로들의 사기를 저하 시키려고 하는 그들의 전술적인 행동의 하나였다.

우리도 그들에 맞서 북과, 장구, 징 등을 치면서 군가를 불렀다. 어느 날 64수용소에 있는 반공포로들은 경상북도 영천 포로수용소(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를 분리시킴)로 갈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전달이 왔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세면도구 보따리를 챙기고 나와서는 미군트럭을 타고 거제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항구에 정박한 미군 수송선 LST((Lading Ship Tank : 탱크상륙전용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미군트럭 편으로 영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포로수용소만 세 곳을 이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산 가야 포로수용소, 거제도 포로수용소, 그리고 영천 포로수용소가 세 번째인 곳이다. 이렇게 포로 생활한 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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