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 온 몸에 그린 태극기와 멸공, 애국 ⓒ제주인뉴스

64우리 포로수용소와 63빨갱이 포로수용소 사이가 불과 10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이다. 1년여 지나면서 포로들끼리 사상논쟁이 극심하게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64수용소 천막으로 돌멩이가 날아오는데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포로들의 난동과정은 볼 수가 없고 큰소리로만 외친다. ‘너의 놈들, 우리 63수용소 진영으로 넘어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너희 놈들!’ 하고 호령하면서 인민 군가를 부른다.

특히 밤에는 더욱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고 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부상당한 포로들도 있었다. 천막이 찢어져서 비가 오면 빗물이 세곤 하니 생활의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수용소에도 극렬분자가 있어 슬금슬금 돌아다니면서 간첩활동을 한다. 우리 64수용소에서도 한 사람이 저쪽 63빨갱이 수용소로 넘어갔다. 밤에는 포로 중 경비병 완장을 차고 각 천막에 순찰을 돈다.

간첩활동을 하던 포로를 잡은 경비병은 심하게 때리고 경비부대로 끌고 가서 미군부대로 인계한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니 마음을 놓아 밤에는 영내도 다닐 수가 없다. 경비병만 완장 끼고 돌아 다닐 수 있다.

이런 일이 심하게 반복되더니 포로들끼리 민주대 공산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벌어졌다. 방망이를 가지고 상대방을 때리고 막사 내에 힘이 센 포로끼리 합심하여 사상이 다른 막사를 침범하여 폭력을 가하는 가하면 뒤따르는 포로들은 인민군군가를 부르고 수용소 영내를 돌아다니면서 밤마다 소란을 피웠다.

65빨갱이 포로들은 우리들을 향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군가를 부른다. 우리도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댔다.

맨 손으로는 부를 수가 없으니 드럼통을 2개로 잘라서 북을 만들고 징도 만들어서 소리를 크게 내면서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1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포로들끼리 폭력이 난무하면서 부상자가 생겨나고 선량한 포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포로감시소에서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포로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포로를 분리하기로 하였다.

사전에 포로들을 분리할 계획을 세우고 경비병이 각 천막을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하였다. “내일은 이북으로 갈 사람하고 이남으로 갈 사람을 분리하는 날이다. 여러분들은 1개 소대씩 열을 지어 천막 앞에 가면 양쪽으로 갈라서서 가고 싶은 데로 가야한다. 만약에 잘못 선정되어 매를 맞아죽어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 판문점에서 북한귀환을 거부하는 포로와 설전을 벌이고 있다. ⓒ제주인뉴스

다음날 하루는 운동장에 큰 천막을 치고 양쪽에 심사관이 앉아있었다. 포로 한사람씩 심사관 앞에서 “이북” 하고 외치면 밖으로 나가서 대기하고 있는 미군 화물차에 타고 한국으로 가고 싶은 포로는“이남” 하고 외치면 천막 밖 이중철조망 사이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나는 “이남”하고 외치고는 천막 밖으로 나가 이중 철조망 사이에 들어갔는데, 이때 경비병들이 천막 옆에 있다가 이북으로 가는 포로병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미군은 옆에 서 있다가 워커발로 차고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어떤 포로는 너무 많이 맞아서 다른 포로들이 양쪽어깨를 잡고 정문 밖으로 끌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차에 실은 다음에도 감시병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후송 중 난동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를 죽이기 위하여 기합을 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을 지원하여 미군트럭을 탔는데 어디로 이동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오후 해질 무렵이 되어 분류가 거의 끝나고 우리들이 막사로 돌아오고 보니 이북으로 간다고 하는 여러 사람들이 떠나가고 난 후라서 막사 내는 어수선하였다.

포로들 중에는 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어깨너머로 들었는데, 미국의 고민거리중 제일 큰 것은 일본의 항복을 받을 무렵의 소련군 참전이었다고 한다.

전쟁말기 1945년 8월 9일에 소련이 갑자기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면서 한반도 쪽으로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하는 것이 두려워 이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38도선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자는 안을 8월 10일 밤에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38도선 분단 안은 당시 미국대통령 트루먼의 승인을 받고나서 연합국인 소련, 영국, 중국 등의 동의를 얻기 위해 8월 15일에 이들 국가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이 이렇게 서두른 까닭은 태평양 전쟁당시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은 중국과 북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던 처지라 이들이 소련과의 유착으로 미국이 불리할 것을 염려한 것이고, 또한 전쟁이 끝나고 나서의 한반도의 점령 또한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문제인데 그 이유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일본)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를 두고 남북한 분할의 주도는 미국이 한 것이라고들 말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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