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제주인뉴스

하루는 한국군 공병대 군인 한사람이 우리소대 앞에 왔다. 사역인부를 데리러 온 모양이다. 천천히 처다 보니 아는 사람이다. 혹시나 하고 가까이 가서보니 고향 친구인 강병대였다. “군인, 날 모르겠소? 강병대 아니오?” 그 때서야 “아니? 이게 웬일이냐?”며 “일화냐?” 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야, 너 그래도 여기로 잘 와서 살았구나. 고향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다 죽고 나도 죽을 뻔 했는데 이렇게 살아서 군인으로 나온 것이 천만 다행이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가까운 부대에 금악 사람들이 몇명이 더 있어 가끔 만나는데 너 소식도 전하여주마”라고 하면서 가졌던 신문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강병대는 수도공사를 하려고 왔는데 일을 마치고는 부대에서 바쁘다며 다음기회에 보자면서 헤어졌다. 그는 부대에 가서 같이 근무하는 이원송 군인에게 내가 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다음 작업병을 데려올 때에는 양공옥이를 데려 오라고 부탁 했다고 하여 뒷날 이원송이가 작업병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전해주었다.

작업을 하러 나갈 때는 정문까지 나가서 두 줄로 정렬하고 기다리란다. 그날은 나도 대열에 서있었는데 공병대 군인들이 왔다.

한 군인이 우리 앞에 다가와서 “여기 양공옥 있어?” 하고 부른다. “예” 하고 대답하여 얼굴을 보니 이원송 형이었다. “너하고 5명만 나를 따라와!”하였다. 우리들 5명은 이원송 형과 부대로 따라갔다. 일은 힘든 것이 아니고 빗자루를 가지고 막사주변을 정리하는 가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부대 내에는 금악 친구들인 양승하, 강정고, 고두화, 홍중협 등이 있는데 오늘은 이들이 다른 데로 사역을 나가고 없어서 자기 혼자만 있다는 말을 하며 고향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다.

오후 5시가 되어서 우리일행을 수용소정문까지 데려다 주어서 인수인계가 끝난 후 우리들 5명은 수용소 소대막사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에는 경비원이 와서 나에게 저기 군인이 와서 부르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뛰어 가서보니 고두화가 경비보초를 서면서 나를 면회하고 싶어서 부른 것이다. 그는 높은 망루초소에서 감시병으로 있었다. 말은 못하고 서로 손을 흔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그날은 서로가 쳐다보며 손짓만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아침 경비원이 우리소대에 와서 정문에 가보라고 하였다, 고두화씨가 정문에 와서 양공옥이를 면회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내가 빨리 정문으로 뛰어가 보니 고두화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용소규칙으로 인하여 한국군이 수용소내무반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문에서도 얼굴을 보고 눈인사나 할 정도이고 가까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다음에 만나서 고향이야기도 전할 테니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헤어져야 했다. 고두화 씨가 금악에 휴가 가서 고향부모님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때서야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 포로수용소가 시설되고 있는 초창기 모습 ⓒ제주인뉴스

그때까지 인천형무소와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인민군에 잡혀 개성에서 훈련받고, 전라도 광양에서 내무서원으로 근무하다 피난길에서 죽을 목숨을 넘기며 근 2년여 고향 소식도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부모님 소식을 접한 후 부터는 “건강하게 있다가 고향에 돌아 가야겠다.”고 다짐하니 수용소 생활도 차츰 안정하게 되었다.

수용소 주변에는 2중 철조망이 단단히 처져 있었다. 그러나 철조망 밖에서는 민간인이 다니는 것도 볼수 있고, 물건을 파는 사람, 떡과 과자를 파는 사람, 엿장수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엿장수들은 포로를 상대로 물물 교환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철조망 곁에 갔는데 철조망동초를 서는 한국 군인이 제주말 사투리로 “이놈의 자식들, 무슨걸(어떤일을) 허염시니(하고있냐)?”란 말에 나는 순간 그가 제주사람이란 것을 직감하고 군인을 쳐다보았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금악리 윗마을 사는 홍중협이란 친구였다. “야, 군인, 너 중협이 아니냐?”하니, 나를 쳐다보면서 “야? 너 공옥이냐?”하며 반가워했다. 철조망이 있어 철조망 밖과 안에서 얼굴만 쳐다보며 외친 말이었다.

홍중협이는 나에게 내가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야! 이 엿 먹어라” 하면서 엿 한 뭉치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고맙다고 하면서 내일은 내가 사지 스봉(바지) 한 벌 갖다 줄테니 이리로 오라고 하면서 막사를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 64동 막사다”라고 알려주고 막사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뒤 지난번에 서있던 곳에서 우리 막사쪽을 향하여 쳐다보는 보초병이 있었다. 홍중협이가 와 있구나 하고 나는 사지 스봉(바지) 한 벌을 가지고 빨리 뛰어가서 철조망 밖으로 스봉을 던져주었다. 홍중협이는 나에게 엿 뭉치를 던져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보초교대 시간이 되어 간다며 서로 헤어졌다. 그 날의 홍중협과의 상면은 마지막이 되었다. 들리는 말에는 부대이동이 되어서 어디로 갔는데 그 행선지를 몰랐다.

엿이 많이 팔리니 철조망밖에는 엿장수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어서, 엿장수 때문에 포로들이 도망가는 사례가 가끔 있어서 수용소에서는 감시가 심하게 되었고, 엿장수 단속이 심해지자 엿장수들은 어디로 갔는지 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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