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니 나를 포로로 잡아온 한국군인은 나의 손을 잡으면서 우리 마음대로 안 되어서 미안하다. “이제 너는 미군에 인계되어 부산 포로수용소로 갈 것이다. 거기서 조사를 받고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가야수용소로 가는 도중에 한국군주둔지 식당에서 포로들은 식사를 하였다. 여기서도 제주도출신 군인들이 있어서 고향소식을 들었더니 고향에 있는 청년들은 4.3사건 당시 거의 죽었고, 살아있는 나머지 청년들만 군대로 나왔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도 인민군에 붙잡히고 지금은 포로가 되었지만 목숨이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란 말을 하였다.

우리가 탄차는 바로 부산가야동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왔다. 이것이 나로서는 포로수용소 첫 생활의 시작인데 이날이 1950년 10월 23일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군은 미군의 작전권하에 있어서 병력의 이동이나 작전, 보충 등 제반권한이 미군 지휘하에 있었으니 부대 장교나 연대장도 미군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할 권한도 없이 미군지시를 받고 있었다.

수용소시설은 일렬횡대로 군인천막이 즐비하게 쳐있었고 사람들은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천막 속으로  들어갈려고 하니 우리 몸에 벼룩, 이 등이 생길까봐 몸에 하얀 살충제(DDT : Dichloro Diphenyl Trichloro)를 뿌려 주었다.

우리는 천막 속으로 들어가서 소대편성을 하였다. 우리 소대장은 대학교수였던 서울 사람이었다. 분대장도 서울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소대별로 포로들의 성향이 제각각 달랐다.

어린이, 노인, 농민, 노동자 등이 모인소대가 있었고, 또한 인민군과 이북출신 그리고 의용군이 있는 비교적 군기가 엄한소대가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상하계급을 따지고 군대와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처음에 입소한 포로들은 입고 온 옷 그대로 입고 있어서 추위에 고생을 많이 하였다. 천막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쌀 담았던 마대를 덮기도 하고, 마대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가야수용소에서 질서를 잡는데 1개월이 걸렸다.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다음 피복과 덮을 담요를 주었다.

피복은 미제 사지 옷이었다. 인민군과 의용군, 젊은이와 노인, 어린이, 여인, 그리고 연령별로 20세 미만인 소년 등으로 구분하여 한 천막에 30명씩 수용하였는데, 나는 소년단으로 분류 수용되었다.

여인들은 따로 천막에 수용되니 밤에는 감시원이 소홀한 틈을 타서 남자포로들은 철조망을 통과하여 여인천막까지 갔다가 미군에 걸려서 죽도록 기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피복은 군복인데 상의 옷에는 PW (prisoner of war: 포로, 또는 민간인 억류자)란 도장이 찍혀있고 그 옷을 입었다.

▲ 살충제 DDT를 뿌리는 모습 ⓒ제주인뉴스

포로들 중에서 제일 편하고 보급품도 잘 받는 소대는 우리 소년단이었다. 옷도 미군 사지복을 입었고 식사도 다른 소대보다 많이 주고 담요도 주고, 매일 운동장에서 운동도 할 수 있게 자유스러웠고 틈틈이 수용소 밖으로 나가서 미군주둔지 등에 가서 피복운반, 쌀 운반, 건빵, 통조림 등 물품을 운반하기도 하니 나의 건강도 좋아졌다. 특히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할 때에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기도 하였다.

하루는 밖으로 작업을 하러 가는데 보초병 중에서 금악 출신 군인 이상원씨를 보았다. 뛰어가서 말하고 싶었지만 미군이 인솔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열에서 빠질 수가 없어서 손만 흔들고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3일 후에는 이상원씨가 작업병을 인솔하러 왔다. 수용자들은 밖에 작업하러 가는 것을 모두들 좋아하여 서로 다투며 경쟁을 하였다. 나가면 부산시내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볼 수 있고 또 일하는 순간은 노동이라기보다 자유스런 시간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특히 식사가 제일 좋기 때문이었다.

군인 이상원씨를 만나 서로 눈시울을 글썽이며 여러 가지 고향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는 도중에도 내 곁에서 걸으면서 말을 하였다. 한 시간쯤 걸어서 작업장에 도착하였다. 작업은 배에 실어온 피복 등을 하역하는 일이었다. 부산부두에는 엄청 크게 산더미처럼 보급물품이 쌓여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포로들은 미군 사지옷을 입었었다, 나는 상원이가 허술하게 입은 옷을 사지옷으로 바꿔 입혀 주기위해 사지 옷 한 벌을 몰래 숨겨서 상원에게 주면서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으라고 주었다. 그런데 그가 화장실에서 몰래 갈아입다 미군에게 들켜서 몽둥이로 몇 대 얻어맞고 또한 옷도 뺏겼는데 이것이 얼마나 서운하고 미안한지 몰랐다.

다음 기회에 사지 옷을 꼭 챙겨줄 생각을 하던 차에 이상원 씨는 다른 부대로 전출가고 그 후는 소식이 끊어졌다. 가야 수용소에서는 소년단 대접을 받으며 다른 포로들보다 편한 생활을 1년 정도한 후 거제도수용소로 간다는 지시를 받고 우리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대기 중이던 트럭에 타고 부산항에서 LST(Landing Ship Tank : 탱크상륙전용 배)라는 배로 갈아타고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향하여 출발 하였다.

그 다음 이상원 씨는 군을 제대하고 나는 석방이 되어 고향 금악에서 이상원씨를 만났다. 지금 이분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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