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 필자 ⓒ제주인뉴스

뒷산 소나무 밭에 모인사람들에게 내무서장이 명령을 하였다. “동무들은 들으시오, 우리들은 작전상 후퇴 하게 되었으므로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놈들(국군)에게 죽을 것이니 계속산길을 따라 지리산을 넘어 목적지인 태백산까지 걸어서 가야하니 한사람도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였다. 우리는 1, 2조로 편성하여 행동을 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는 따로 후미에서 행군하도록 하였다. 조장의 뒤를 따라 계속 산길을 가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 낮에는 산비탈이나 나무 밑에서 쉬고 일몰후 야간에만 걸었다. 산기슭에는 피난 가는 사람들로 이어진 줄이 몇 참(수 km)이나 되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가면서 마을이 보이면 거기에 가서 식량을 구해 먹었으며 먹다 남은 음식은 짊어지고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인민 경찰에서 후퇴하라는 지령을 받고 우리는 마을 사람들하고 한 부대가 되어서 태백산까지가 목적지란 말을 듣고 지리산 쪽으로 후퇴하면서 올라갔다.

1950년 10월 7일경 일주일정도 걸어서 지리산에 도착하고 보니 각처에서 피난 온 남녀노소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피난가는 사람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수, 순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제주도 4.3사건과 똑같은 일이 그곳 여수, 순천에서도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형무소로 징역 갔다고 하였다.

나는 형무소감방 안에서 순천사람과 같이 생활을 하여 여수, 순천사건은 대강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도 똑같은 말을 한다.

며칠 동안 지리산에서 행군을 하다 보니 먹을 것도 없고 신발도 다 떨어지고 걸을 수가 없다.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배가고프니 칡뿌리를 캐어먹으면서 하염없이 앞 사람만 뒤따라 보면서 걸어간다. 우리는 경상북도 상주까지 올라갔지만 많은 사람이 지리산에서 떨어져서 공비생활을 하다가 죽거나 잡힌 사람이 많이 있었던 것을 소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1950년 10월 10일경까지 행군한 것이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 수백 명이던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그 숫자가 점점 줄어졌다. 자기들끼리 마을로 도망가거나 각자 행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의 인솔자와 내무서장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략 4,50명 정도였다. 민간인에게 들으니 한국군이 바다에서부터 공격해서 이쪽 산으로 올라오고 있어서 뒤에서 공격해오는 한국군을 피하기 위해서는 태백산 속으로 계속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지서주임은 혼자만 살려고 태백산맥에서 약삭빠르게 어디론가 도망갔다.

오늘은 1950년 10월 15일 선소리 바닷가 내무서를 출발한지도 보름이나 되었다. 전라도 끝부분 경상도 경계에 이르렀다. 오는 도중에도 인민군과 한국군의 시체가 보였지만 여기에도 죽은 사람이 많이 보이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런 생각이나 별다른 감정도 없었다.

▲ 인민재판 모습 ⓒ제주인뉴스

가로막힌 강을 건널 때는 옷을 벗고 머리에 얹어 강을 건너는데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를 한국군으로 알고 주변에 있는 인민군이 오인사격을 한 것이었다.

행군하여 15여일 동안 지리산등지를 피신하면서 우리나라 서남부 지역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산은 옛날부터 난리가 날 때면 피난지로 여겼다고 하였다.

가다보면 죽은 군인과 인민군시체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 되어 있어도 어느 누구 한사람이 나서서 나뭇가지나 흙으로 덮어주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쫒기는 몸이니 언제 누가 어디서 우리를 향하여 총을 겨누고 있는지도 모르는 긴장하고 절박한 마음과 함께 언제 우리도 이 산골에서 저들과 같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뿐이었다.

제주도 4.3사건 무렵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들이 있었다.

1948년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1개 대대병력이 제주도 4.3사건 토벌작전명령을 받고 여수항에서 출발할 계획이었는데, 그 전날 10월 19일 오후8시쯤에 인사계선임하사관 지창수가 40여명의 공산당 조직원들에게 병기창고와 탄약 창고를 장악케 한후 비상나팔을 불고는 출동준비를 한 1개 대대를 집합시켰다.

이때 나머지 2개 대대도 연병장에 집합시킨 후 지창수는 우리 애국군인은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제주도 애국우리 인민에게 총을 쏠 수 없다고 한 후 우리는 악질경찰타도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갑자기 선언하였다. 대부분 사병들은 환호를 하며 호응하였으나 갑작스런 선임하사관이 선동에 반대하는 사병들이 있자 즉석에서 총살까지 하였는데, 이때 군인들이 제주도에 내려왔으면 더 많은 제주도 양민이 학살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렇게 연병장에서 지창수의 선동에 동조한 군인 약3천여 명이 부대를 나와 시내로 진입하면서 경찰관서를 장악하고 하룻밤 사이에 여수 시내를 완전히 반란군이 장악케 된 것이다.

이때 여수시내의 좌익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단체 및 학생들 600여 명이 반란군에 합세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주요기관을 다 장악케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20일 아침에는 반란부대 총지휘자는 대전차포 중대장인 김지회 중위가 남로당원임을 밝히자 반란군들은 김지회 중위의 지시하에 들어갔다. 오전9시 30분에는 2개 대대 반란부대를 열차편으로 순천으로 이동시켜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14연대 2개 중대가 홍순석중위 지휘하의 반란군과 합세하게 되었다.

순천도 반란군이 완전 장악 후 3개부대로 나누어 학구, 광양, 벌교로 행진하면서 광양, 벌교, 학구, 구래, 곡성 등을 22일까지 점령하게 된다.

국군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 21일 광주에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투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의 지휘하에 7개 대대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공격하면서 여수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0월 25일에는 여수 순천을 탈환하고 도망가는 반란군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란군 1000여 명이 광양 백운산, 지리산 화엄사골, 웅석봉 산악지대로 도피하였다. 도피중 토벌대에 사살되었거나 병사, 아사하였거나 하여 그해 말에는 350명밖에 생존하지 않았으니 반란군 3분의2정도는 산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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