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제주인뉴스

1950년 8월 5일경 무더운 날 훈련이 종료되어 30일간 개성에서 인민군 교육을 받은 동기생 전원은 남한의 행정기관과, 도, 시, 군, 읍, 면으로 배치 받았다. 우리 일행들은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싸우라고 훈련을 받고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남한에 내려가서 치안확보와 여수, 순천, 제주도의 4.3사건의 북한 공산당편 요원이므로 특수전 및 게릴라전을 펼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고행문형은 충청도로 배치되고, 나는 전라남도 여수로 배치 받았고 내려가는 길은 충청북도 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떠나는데, 1개 소대 30명씩 편성되었다. 소대장은 대원끼리 선출하였는데 인민군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자로 선발되었다. 소대장에게는 99식 장총 한 자루와 실탄 10발이 지급되었고 소대 밑에 또한 분대장 3명씩을 선발하였는데 분대장도 주체사상이 확고한 자로 선발하여 수류탄 각 2발씩 지급해 주었다. 1950년 8월 7일 부대에서 출발한 시간은 저녁9시쯤으로 무덥고 캄캄한 밤이었다.

행군에 앞서 인민군이 신고 있는 발싸개와 비누를 지급받고 발싸개에 비누를 칠하여 신은다음 농구화를 신었다. 개성에서 출발한지 3일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시 용산 부근이었는데 인민군주둔지 근처에 한국군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면서 전쟁 중이었다. 인민군의 말에 의하면 용산에는 탄약고가 있어서 그것을 한국군이 폭격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민군은 지상에서 야포로 비행기를 향해 쏘면서 대항했지만 비행기는 포탄을 투하하고 사라지곤 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일행들은 소대원과 같이 선발대를 따라 계속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발싸개에 비누칠을 하고 철저히 준비하였으나 발바닥이 부풀고 다리도 아파서 행군하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솔자는 밤낮으로 행군을 강행한다. 서울지역을 벗어나서 어느 촌락에 도착하여 인민군사무실을 찾아가 식사를 하고 하루 종일 쉬었다.

하루를 쉬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부대장 인솔에 따라 야간행군으로 남쪽으로 걸었다. 철로가 보여서 혹시 화물열차라도 있으면 탈 생각으로 걸었는데 마침 석탄을 운반하는 화물열차가 있어서 그 열차위에 타서 조치원에 도착했고 우리는 잠시 그곳 역내에서 인원점검을 받았다.

인솔자의 말은 이곳 조치원은 전투가 아주치열한 곳이니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 경이었다. 내일이면 각자 배치 받은 지역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였다.

조치원역 주변을 보니 인민군전차와 야포가 폭격을 받아 불타고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고, 민가 집과 건물들도 포탄폭격으로 불타고 부서지고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리의 밤 행군이 시작되었다. 나와 고행문형은 일행과 같이 걸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논두렁을 따라 일렬종대로 걷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총알이 빨간 불빛을 가르면서 우리 앞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열이 흩어지면서 논두렁에 엎드렸다. 인민군과 국군의 교전인지 우리를 향해 국군이 쏘는 것인지, 인민군이 우리를 향해 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앞뒤에서 같이 걷던 고행문형도 안보이고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걷고 있던 방향으로 뛰어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기관총소리는 주변과 뛰어가는 사람을 향해 계속 난사한다. 총알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린다.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포로가 될지도 몰라 계속 낮은 포복자세로 앞을 향해 기어갔다.

총소리가 조금 멈추는 틈을 타 뛰기도 했는데 옆에서 누군가 “아이쿠!”하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아비규환 지옥이란 이런 모습을 말하는가?

칠흑 같은 밤이라 사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알수가 없었고, 고행문형은 어디로 갔는지 논두렁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비명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형!”“형!”하고 여러 번 불러보았지만 형의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엎드린 채 앞을 보니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우리 일행으로 알고 그 사람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관총소리는 멎었고,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 묵묵히 걸어간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도 출발해서 5시간쯤 된것 같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아침이 밝아오고 얼굴을 분간 할 수 있는 이른 아침에 대원들을 보며 고행문형을 혹시나 하고 찾았으나 없었다.

처음 전라남도 여수지역으로 배속 받을 때는 고행문형과 같이 행동하다 전쟁이 끝나면 같이 고향으로 가자고 굳게 약속했는데, 기습공격을 받을 때 논밭에서 쓰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고 같이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도해주곤 했는데 앞으로는 혼자서 어떻게 지낼 것인가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였다.

아침이 밝아 모인 우리일행을 점검하였는데 많은 인원이 낙오되었다. 내가 속해있는 소대원 30명 중에서 모인인원은 10명뿐 이었다. 도착한 사람들에게 행문이형을 못 봤느냐며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찾아보았으나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찾을 수도 없고 밤에 걸어온 길이기도 하여 더군다나 찾아갈 수가 없었다.

이 전쟁중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목적지인 광주까지 가는 길이 막막하게만 여겨졌다.

어느 지역에나 가도 의용군사무실에 인민군들을 찾아가면 식사는 어렵지 않게 해결해 주었다. 우리소대원 10명중 5명은 광주로 가는 한조가 되어 아침식사 후 출발하였다. 처음 개성에서 출발해서 15일째 되는 1950년 8월 22일 경이다. 앞으로 보름간은 더 걸어야 목적지인 광주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걷는 것도 낮에는 비행기폭격 때문에 민가나 소나무 그늘에서 쉬다 일몰이 되어 어두워져서야 길을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목적지 광주에 도착하였다.

오는 도중 민가에 들려 봐도 사람들은 피난 가고 없고 마을에 가도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광주에 거의 도착하여 어느 민가로 들어가 보니 노인부부가 있었다.

“배가고프니 밥이나 좀 주십시오.” 하고 말했더니 “반찬은 없지만 찬밥은 있다”고 하면서 밥을 주었다. 노인은 우리를 보면서 조금은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우리는 인민군도 한국군도 아니고 피난 나온 사람들입니다.”하고 안심시켰다.

노인은 우리에게‘빨리 식사하고 여기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지난밤에도 앞산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여기도 위험하다’고 말을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는 덜컥 겁이 났다. 살려고 내려온 길이 사지(死地)에 온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미쳤다. 아직도 광주시내는 한참 가야하는 거리라서 식사를 한 후 우리들은 산기슭을 따라 광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인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우리일행은 아무 생각없이 계속 걸었다. 배도 고프고 피로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것만 생각하며 걷다보니 민가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그 마을은 인민군이 통치하는 마을이었다. 내무사원을 찾아가니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동무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요?”라고 물으니까 “우리는 광주 내무서(지서)를 찾아가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어서 내무서 사원이 고맙고 조금은 긴장했던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점심도 못 먹어 배가 고프니 저녁이나 먹고 갑시다.” 했더니 푸짐하게 밥과 반찬이 나왔다. 허기진 배를 양껏 채우고 우리는 광주로 빨리 가야하니 누가 우리를 안내해 달라고 말을 했더니 광주지리를 잘 아는 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길 안내를 잘해줄 거라고 한다.

우리는 또 염치불구하고 신발 얘기를 했다. 며칠을 걷다보니 신발도 다 헐어서 형편이 말이 아니라고 하자 친절하게도 우리들 각자에게 헌 고무신 한 켤레씩을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안내원이 앞장서서 걷고 우리는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광주내무서(지서)에 도착한날이 처음 걸어서 개성에서 출발한지 30여일 만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가 1950년 9월 초순의 무더운 날이었다. 그동안의 배고픔과 다리아픔, 발바닥에 물집이 터지는 고통들을 어찌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있을까?.

광주내무서(지서)에 도착하여 내무서장에게 신고식을 하였다. 신고식은 “누구 외 4명은 수령님의 명령을 받아 이곳 광주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신고합니다.”신고를 받은 내무서장은 “연락받았을 때는 20명이 온다고 들었는데 왜 5명뿐인가?” 라고 물었다.

“예, 오는 도중에 교전이 벌어져 도망을 갔거나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래 너희들은 지금 식사를 하고 나면 여수, 순천, 광양 등지로 한사람씩 배치할 것이니 착오 없이 목적지에 가야한다.”라고 명령하였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데 아가씨 한사람이 제주도 사투리가 섞인 말을 하였다. 오랜만에 제주도 말을 들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아가씨 동무, 고향이 제주도지요?”하자 놀라는 표정으로 “예”하며 대답은 하나 조금은 겁이 난듯한 표정이었다.

우리의 복장은 인민군복과 계급장을 달고 있었으니까 의외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실은 우리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인민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광주 이곳으로 와서 내무서(지서)에 근무하려 왔는데 다시 읍, 면 지역으로 배속될 것이란 말을 조용히 하였다.

아가씨의 말은 자기는 광주 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는 중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하여 시민들을 해방하여 의용군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임시로 이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였다.

밥을 많이 드시라면서 밥과 반찬도 풍족하게 갖다 주면서 반가워하였다. 식당에서 제주아가씨의 친절한 대접을 받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준비를 철저하게 하였다.

해질 무렵 내무서장이 우리를 불렀다. “너희들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절대 후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제주도에는 해방이 되어서 너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면서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지도에는 부산, 대구지역만은 파란표시가 되어 있고 그 외 지역과 제주도까지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지도를 보는 순간 얼마 없어서 고향에 갈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적지까지 가는데 지도 한 장을 주면서 길안내가 필요하니 참고하도록 하였다. 내무서장(지서장)이 하는 말은 낮에는 누가 보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다가 어두운 밤에만 걸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다.

광주시내의 밤은 캄캄하여 가로등이 하나도 안 보였다. 등화관제 때문인지 아니면 폭격으로 전선이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마디로 암흑도시였다. 그날 저녁 광주 시내를 벗어나서 계속 걷는데 내가갈 내무서는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선소리바닷가 쪽이니 여수와 순천으로 가는 사람들 보다 제일 먼 곳에 배속 받은 것이었다.

동행했던 친구들은 여수와 순천에 먼저 도착하고 나 혼자만 목적지까지 가는데 하루를 더 걸어야 했다. 광주에서 내무서장의 지시를 받고 출발한지 6일 만에 1950년 9월 13일, 목적지에 아침 10시경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선소리에 소재한 바닷가 내무서(경찰서)에 도착한 것이었다.

내무서장은 별 하나를 단 사람이었다. 경례를 붙이고 “신고합니다. 수령님의 명을 받아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하자 “그래, 동무는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예, 제주도입니다.”라고 하자 “그래, 잘 왔어.”하며 반색하는 표정이었다. 내무서장은 제주도가 해방이 되었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 지도가 아니고 조선 지도를 보여 주었다. 지도에 표시된 것을 보니 대구, 부산만 파란색으로 표시되고 그 나머지와 제주도까지는 빨간색으로 물들여 놓고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고 허위선전을 하였다. 인민군 말에 의하면 제주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남로당이 승리하여 공산주의가 되었다고 선전을 한 것이다. 인민군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선전한다. 제주도가 공산화가 되니 부산바닷가로 인민군이 공격하여 올라오고 38선에서 내려오는 인민군하고 양면작전을 펼치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선전을 한다. 이 정보를 수집한 국군은 후퇴하게 된다. 물샐틈없이 밀려 내려오는 인민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국군은 부산을 사수할 목적으로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1개월 이상 전투를 하고보니 쌍방의 병력이 헤아릴 수없이 많은 군인이 죽어갔다. 그 당시 낙동강 물은 붉은 피로 물들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1개월 이상 전투를 하다 인민군은 후퇴하게 되는데, 이때를 즈음하여 해병대 3기생과 미 해병대와의 합동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9월 15일 아침 인천에 상륙하여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양평, 원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자 낙동강전선에 있는 인민군들은 후퇴하게 된다. 국군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공격하니 많은 인민군이 죽고 나머지 인민군들은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들어왔는데, 그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낙동강전투에서 잡힌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하였다. 내무서장의 허위선전인 것을 그 당시 나는 몰랐다. 내무서장도 몰라서 그런 이야기를 한것 같다. 바닷가 가까운데 왔으니 고향 가는게 쉬울 수 있다면서 껄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무는 “식사를 하고 저 높은 초소에 올라가서 보초를 서라”면서 총 한 자루를 주었다. 총을 받고 보니 소련제 총인데 손잡이가 구부러지고 총알이 없는 빈총이었다.

높은 보초막에서 두 사람이 교대하면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근무를 하였는데, 언제면 고향에 갈까하는 생각과 부모님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면서 지낸 날이 10여일 정도가 되었다. 오늘이 1950년 9월 25일(음력 8월 14일)추석명절 전 날이지만 저 둥근 보름달을 보니 고향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동생, 마을친구들 생각이 더욱더 간절하고 오늘따라 휘영청 달은 더욱 밝게 보였다.

보초막에서 보초교대를 하고 왔는데 마을 이장님이 우리를 초청하여 음력 8월 15일 추석명절음식을 잘 차려주어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내무서장(지서장)이 명절음식을 먹은 후“내일은 인민공화국에서 빈부차이 없이 농토를 꼭 같이 분배할 것이니 이장님께서는 마을주민을 동원해 주시고 거리를 잴 새끼를 꼬아서 오도록 전해주십시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곧 명령이었다. 이장은 “예, 알았습니다.”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돌아왔다.

다음날인 1950년 9월 26일(음력 8월 16일)아침이 밝았다. 계획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날이다. 마을 사람들이 논밭으로 모였다. 논 한 필지를 500평 정도씩 미리 새끼줄 가로, 세로의 길이로 정하여 김 씨네 논, 박 씨네 논, 이 씨네 논 하며 명부를 주어도 불평불만을 하지 못한다. 그 경우 반동분자라 하여 비판을 받거나 숙청을 당하게 되니 그 어떠한 불평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논밭 한 평도 없었던 사람은 논밭을 공짜로 받게 되니 여간 기쁠 수가 없는 일이니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토지분배를 보면서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실상이구나 하고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보고 내무서로 와서 어제까지 섰던 보초막에서 보초를 섰다. 자정이 지날 무렵, 천둥번개가 치듯 불빛이 번쩍이며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가까운 야산에는 열을 지어 산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하고 있을 때 같이 보초를 섰던 사람이 뛰어오면서 하는 말이 빨리 보초막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내무서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너희들은 보따리를 빨리싸서 뒷산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조금 전에 보초막에서 본 사람이 산으로 도망가는 것은 피난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2일후 오늘이 9월 30일 이다.

이 마을 주변에서 한국군과 인민군과의 사이에 교전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내무서장의 인솔하에 산으로 뛰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며칠 먹을 양식을 보따리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보니 마을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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